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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원 생활

[세르비아 생존기] 도마뱀이 나타났다.

by 여배 2020. 4. 8.

 

나는 겨울의 끝자락에 이곳 베오그라드에 부임했다. 한국도 설 연휴를 기점으로 추위가 가시는 추세였고, 한국의 겨울보다는 덜 춥다는 말을 도착한 날부터 바로 실감할 수 있을 만큼 세르비아의 겨울은, 적어도 베오그라드의 겨울은 그렇게 춥지 않았다. 그렇게 춥지 않은 겨울이지만, 도시의 인상이 주는 황량함은 체감 온도를 조금 더 낮게 만드는 듯했다. 강남의 빼곡한 빌딩 숲은 도시를 실제로 겨울엔 더 춥게, 여름엔 더 덥게 만들지만, 빼곡한 빌딩 숲이 주는 시각적 안정감이 겨울을 조금 덜 춥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베오그라드는 몸은 비교적 따뜻해도 눈앞에 펼쳐지는 황량한 경관이 주는 정서적 추위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반복해서 밝히지만, 베오그라드 전역이 황량하지는 않다. 구도심은 오래된 고층 빌딩이 꽤 있고, 고층 빌딩에 이어진 광장, 강나루를 종합한 경관은 꽤 매력적이다. 

 

두 달 전쯤 어느 겨울날, 우리 지사의 동료 한 명은 나에게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베오그라드에 너무 실망하지 말라면서 "봄이 다가오고 있어. 베오그라드는 봄이 정말 환상적이야. 그러니 지금의 베오그라드를 보고 너무 낙담하지 마"라고 이야기해줬다. 그 동료뿐 아니라 동료들을 모이면 줄곧 봄이 찾아왔을 때 어디로 소풍을 가면 좋은지를 이야기하곤 했다. 2월까지만 하더라도 세르비아에게 코로나바이러스는 중국의 이상한 식성이 만들어낸 "지역적 해프닝"에 불과했다. 그래서 녹색이 일렁이는 봄이 올 때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최대한으로 즐길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느라 다들 격앙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코로나바이러스가 세르비아를 덮쳤다. 경제는 물론 생활이 마비되었다. 그나마 평일 낮 시간 동안에는 아직 통금령이 시행되지 않아 잠시동안 산책을 할 수 있다. 며칠 동안 아침에 달리기를 못하고 사무실과 집에서 너무 오래 앉아있던 탓에 오늘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짧은 산책을 했다. 출퇴근 길에 봄이 찾아와 꽃가루가 코를 간지럽히고 옷을 가볍게 하고 있음을 느껴왔지만, 자동차에 탄 채로 주차장에서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출퇴근과는 달리 내 발로 땅을 디뎌 걸으며 느끼는 봄은 다른 세상이었다. 그리고 도마뱀을 발견했다. 빠르게 움직여서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도대체 얼마 만에 발견한 도마뱀인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동네 친구들과 정신없이 뛰어놀다 지겨우면 뜰에 가서 도마뱀을 잡아 놀던 기억이 떠오르며 그 기억이 매우 생경스러웠다.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도마뱀은 내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유럽 전역에서 폐쇄령을 시행한 탓에 역설적으로 공기가 맑아지고, 야생동물들이 도시에 출몰한다는 기사를 얼핏 봤었다. 고라니나 맷돼지 처럼 소란을 일으킬 법한 큰 동물은 아니었지만, 오늘 발견한 도마뱀은 그러한 자연현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얼른 잠잠해지길 바라는 마음의 발현이 베오그라드의 봄을 온전히 즐기고 싶다는 얄팍함에 기인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봄을 즐기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정말 경제가 박살 나서 모두 굶어 죽을 것 같은 불안감이 더 크다. 그러나 불안감에 파묻혀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러한 우려를 아는지, 오늘 24시간 중 10초 남짓한 시간 동안 만난 도마뱀은 그래도 봄이 왔음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반가운 인사였다. 

 

베오그라드에, 도마뱀이 나타났다. 

 

 

 

 

적당한 봄 사진이 없어 몇일전 동료에게 받은 해질녘 베오그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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